"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노력이 다음 정부에서도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그래서 얻어지는 결과라야 진짜 평화라는 주장을 들을 때마다 심란합니다. ‘판문점 선언’과 ‘평양선언’을 통해서 거둔 성과를 두고 “정치적 쇼”, “평화는 말이 아니라 힘이 보장한다”, “북한을 주적으로 명시하겠다”면서 “선제타격”과 “킬체인”을 운운하는 등 호전적 의지를 과시할 때마다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최근에는 “사드 추가배치”를 공약하였습니다. 혹시 정전체제를 종전체제로, 나아가 평화체제로 발전시키려던 노력을 일거에 무너뜨리려는 것인지 불안합니다. 모든 후보에게 호소합니다. 오랜 세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쳐온 한국천주교회의 기도를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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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신앙, 민주주의와 평화”
-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즈음한 천주교 평신도 수도자 사제 1만 5천인의 호소 -
공익과 공동선언을 위해 여러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헌신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1.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이번 선거가 대한민국을 한층 새롭고 정의롭게, 행복하고 이롭게 만드는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사랑의 탁월한 형태 가운데 하나(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05항)”임을 생각하며 정치적 소명을 받은 모든 이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2. 모든 선거가 그렇지만 대통령 선거는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정치행위입니다. 누가 과연 공동체의 선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줄 적임자인지 그 식별의 책임은 권력의 발원지이며 주권자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이지 않는 손들의 너무나 노골적인 훼방으로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과 공정한 숙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먼저 그 책임을 언론과 검찰, 법원에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뉴스를 접하고,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판결에 의지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권자들의 선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는 언론과 검찰, 법원은 우리 사회의 어떤 집단보다 중립과 공평, 법과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기관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구성원 가운데 기자들의 ‘기사’, 검찰의 ‘기소’의 공정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두 집단의 편향성은 대선 정국에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후보와 가족에 대한 검증이 한창입니다만 언론 종사자들이 불편부당한 자세로 양심껏 보도하고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검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 따라 누구는 피의자 조사도 없이 기소하고 누구는 기소는 커녕 심지어 조사에 불응하더라도 그냥 봐줍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정의의 최종 수호자여야 할 법원의 판결도 귀를 의심할 정도입니다. 건강보험료 수십억 원을 떼먹어도 무죄를 선고하면서 입시에 반영되지도 못하는 표창장 의혹만으로 징역 4년을 판결합니다. 없는 죄는 만들고 있는 죄는 덮습니다. 시중에는 검찰청이 북 치고 법원이 장구 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우리는 지난 2020년 12월 7일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선언’에서 촉구했던 일들을 실천에 옮길 후보가 누구인지 따져보고 있습니다. 재난 지원금도 못잖게 재난 상황에 걸맞은 상식과 이성의 회복이 더 시급해진 이때에 언론, 검찰, 법원의 회개를 위해 기도합니다.
4. 한편 아무 갈피도 잡지 못한 채 소문만 무성한 무속 논란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무속이 노골적인 대선”이 되고 말았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력 후보 가운데 스스로 생각해서 책임지고 결단할 일을 점쟁이에게 묻는 이가 있다고 합니다. 압수수색을 발동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안을 두고 누군가에게 물어서 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나아가 그랬던 이유마저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한사코 이성과 신앙의 조화와 종합을 위해 분투했던 가톨릭교회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문명사 전체를 압축하면 주술의 시대에서 합리적 이성의 시대로의 이행이라 하겠습니다. 어언 금번 대선은 이성적 평화 세력에게 미래를 맡길 것인가, 아니면 주술 권력에게 칼을 쥐어 줄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성이 쓰러진 자리에 주술이 들어서고 광기가 돋아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의 병과 한을 어루만져 주던 무속의 역사를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인생사를 독립적으로 판단 내리지 못하고 보편성, 타당성, 신뢰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바깥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온 사람이 아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각축하는 국제사회 속에서 ‘통일 코리아’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기나 할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주술은 국가의 의사결정을 왜곡하며 공포를 유포하고 불안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 종교의 가르침이 생명의 ‘말씀’이 되는 까닭은 정의와 평화, 인권이라는 만고불변의 가치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 종교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주술을 미워하는 이유도 ‘이성’이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부정하고 사리사욕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현실을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술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고백적 행동입니다.
5.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노력이 다음 정부에서도 변함없기를 바랍니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그래서 얻어지는 결과라야 진짜 평화라는 주장을 들을 때마다 심란합니다. ‘판문점 선언’과 ‘평양선언’을 통해서 거둔 성과를 두고 “정치적 쇼”, “평화는 말이 아니라 힘이 보장한다”, “북한을 주적으로 명시하겠다”면서 “선제타격”과 “킬체인”을 운운하는 등 호전적 의지를 과시할 때마다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최근에는 “사드 추가배치”를 공약하였습니다. 혹시 정전체제를 종전체제로, 나아가 평화체제로 발전시키려던 노력을 일거에 무너뜨리려는 것인지 불안합니다. 모든 후보에게 호소합니다. 오랜 세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바쳐온 한국천주교회의 기도를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6. 오늘 우리가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말씀드리게 된 것은 이성과 공익의 상실, 그로 인해서 민주주의와 공동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미워하고 참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시민들이 희망입니다. 성경과 복음이 사람에게 재촉하는 바는 애오라지 서럽고 배고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입니다. 부디 자기를 위하되 모두를 이롭게 하는 정의로운 선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7. 이 시간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 계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나도 일하고 너도 일하고 나도 잘 살고 너도 잘 살되 모두가 올바로 잘 사는 ‘고루살이’의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