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영성, 평화교육

제4회 동북아시아 화해를 위한 크리스챤 포럼 재일교포 김신야 목사님 증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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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야

 

 

 

 

아버지와 나

 

부친은 1934년생으로, 17년 전에 돌아가셨다. 고백컨대, 나는 아버지에게 그리 착한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들이 대개 그렇듯이 어린 시절에 나 역시 아버지에게 반항적이었다.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자각이나 인간의 고통에 함께 아파해 본 경험도 부족했기에, 아버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야 그런 내 자신이 후회스럽다. 그래서 오늘 나는 역사의 산 증인의 증인이 되어 보려 한다. 생전에 아버지가 자주 뇌이던 이야기를 최대한 기억해 내 보겠다.

 

군국주의 소년과 해방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국민학교 시절에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조선인이 그랬듯이, 아버지도 일본 시민이 되었고 일본 시민으로 생활했다. 학교 성적은 좋았다고 한다. 한번은 담임선생님이 급장을 맡아 보라 권해서 뛸 듯이 기뻤는데, 마을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다. 식민지 출신의 소년이 제국의 아이들에 대해 지도적인 역할을 지닌다니 말도 안 된다는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일이 있은 뒤, 아버지는 점점 더 애국자가 되어 갔고, 제국의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일본 천황에 더 강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곧바로, 일본은 전쟁에 패배했고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조선인들이 해방을 맞았다. 천황에 충성하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 제국의 붕괴를 보며 완전히 넋이 나갔고, 우리 아버지도 그랬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달랐다. 전쟁 동안에는 할아버지 역시 애국적인 일본 시민이었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일본이 굴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밖으로 뛰어나가 마을을 돌며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는 할아버지를 본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해 반역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떤 기도

 

해방 된 뒤 곧바로 아버지 가족은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갔다. 1945년인가 46년의 일이다. 불행하게도 폭풍우를 맞아 배는 거의 난파 위기에 처했고 아버지는 너무나 겁에 질렸었다고 한다. 그런 혼돈 상황에서 아버지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배 밖으로 짐을 버리느라 북새통이었는데, 할머니는 미친 듯이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가톨릭신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를 하다니 아버지는 할머니가 미쳤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스스로가 제국주의 엘리트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무학이셨던 할머니가 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주 4?3 봉기/학살이 발발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제주에 할머니와 3살배기 남동생을 남겨 두고 다시 일본으로 도망쳐 나왔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로 봉기 운동에 가담하셨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두 번 다시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하시며 아버지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을 보았다. 할머니를 그리워하셨던 것 같다. (당시 단독 선거에 반대한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주의자라는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남은 할머니와 작은 아버지는 빨갱이낙인을 받아 취직이나 생활하시는데 엄청난 고초를 겪으셨다고 한다).

 

제주의 땅

 

일본 제국주의자이자 군국주의자로 성장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강한 제국주의자적인 태도가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녹아 없어졌다고 고백했다. 제주의 땅이 아버지를 변화시켰다. 흙으로 인해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라는 감각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제주의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뿐만 아니라 젖소, , , 똥돼지들을 키워 낸 흙에 대한 사랑이었다. 제주 고향으로 돌아간 뒤 날마다 3개의 마을을 가로질러 먼 길을 걸어가야 했던 학교에서 아버지는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과 땅바닥에 뒹굴며 놀고 땅에다 침을 뱉고 오줌도 누었지만, 땅은 아이들에게 불평 한 마디하기는커녕 아이들을 보며 웃어주는 듯했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조용히 피어나는 꽃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그 식물을 키워 낸 땅에 자신의 뺨을 대고 싶어 하셨다.

흙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주의 땅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셨다. 땅의 겉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제주의 흙이 점점 아스팔트로 덮여 가기 시작했다. 아스팔트로 덮인 일부 땅 밑에 4?3 학살 피해자들이 적어도 80 구 이상 묻혔다. 한번은 1988년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를 보여주셨는데, 아스팔트로 덮인 제주 공항의 활주로 일부에 피해자들의 시신이 묻혀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회상하셨다. “나는 여전히 친구들과 함께 밟고 뺨을 대며 놀았던 그 땅의 느낌이 생생하다. 내가 알고 있던 땅이 달라진 거 같다. 나는 아스팔트를 밟을 수 없을 거 같구나. 아스팔트에서는 폭력의 무게와 부피가 느껴지니 말이다. 폭력은 여전히 다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제주에서 멀리 떨어진 동경에 살고 있는 너와 나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지. 언젠가 네가 제주 땅에 갈 기회가 생기더라도 비행기로는 가지 말거라.” 이게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민중봉기/학살/사건

 

우리 가족이 일본에 살게 된 이유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4?3 봉기/학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셔서 직접 가담한 시위가 4?3 봉기를 촉발한 19473?1 시위인지 그 후에 일어난 총파업인지 또는 4?3 봉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시위 사건에 대해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중학생이던(13살인가 14살 경) 때 친구들과 시위에 참가하여 봉선화를 목 놓아 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아버지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친구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목격했다. 아버지 옷에도 피가 튀었다. 시위대를 빠져 나온 아버지를 본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데리고 일본행 배에 올랐다. 배에서는 꼼짝 달싹 할 수 없는 좁은 화물칸에서 들어 앉아 머리도 내밀지 못했다고 한다. 근 일주일 만에 일본에 도착해서야 아버지는 화물칸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며

 

아버지는 자주 악몽을 꾸셨다. 내 방에서도 아버지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악몽을 꿀 때마다 아버지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땀에 흠뻑 젖곤 하셨다. 그것이 오래 동안 나에게는 그저 신음소리에 불과했고,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자주 악몽을 꾸시는지, 악몽 뒤에 숨겨진 역사의 기억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새로운 인식은 내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약혼자를 아버지에게 인사시키러 데려 왔을 때 이루어졌다. 약혼자의 아버지가 평안도 출신이라고 말하자, 돌연 아버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더니 그 동안 억눌러왔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이 제주 4?3 봉기를 진압하는 측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폭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가족과 가족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를 갈라놓는다. 하지만 하느님은 결혼식을 통해 우리 가족과 아내 가족의 화해를 준비하셨다. 화해는 양 가족의 경험, 4?3 학살 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이산가족이 되어야 했던 비극,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공산주의 정권의 압박 아래 경계를 가로질러야 했던 북한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을 서로 받아들이게 했다.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아버지의 신음 소리는 그 자체로는 신음일 뿐이다. 그러나 아들인 내가 신음소리 뒤에 담긴 목소리를 알아채기까지는 40년이 걸렸다. 이 일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예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신음소리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나타낸다. 여전히 신음하고 속삭이고 있는 수많은 소리 없는 목소리들이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신음과 속삭임 뒤에 숨겨진 진짜 목소리들은 언젠가 증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미 세상을 떠난 위안부(성노예) 여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고, 제주 공항 활주로 아스팔트 밑에 묻힌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고, 이제는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구럼비, 강정 마을의 땅의 소리를 듣고 있다.

나는 오직 하느님만이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증언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초대하셨다고 믿는다. 나는 단지 4?3 봉기의 증인의 증인일 뿐이고, 한 때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시고, 앞으로도 귀담아 들으실 하느님,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그의 증인으로 만드시는 하느님을 따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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