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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베드로 주교
나는 젊은 시절 연못 낚시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어린이가 큰 잉어를 들고 와서 바늘을 빼달라고 했다. 그런데 낚싯바늘이 잉어의 입이 아니라 눈가에 꽂혀 있었다. 낚싯대를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잉어 눈에 바늘이 꽂힌 모양이었다. 물고기라 해도 눈 가장자리에 바늘이 꽂힌 모습은 보기에 너무 측은하여 빨리 바늘을 빼주려 했으나 잘 빠지지 않았다. 잠시 낑낑댄 끝에 겨우 바늘을 뽑아주었다. 그런데 그때 잉어가 고통스러워하며 ‘끼륵’ 하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나는 생전 처음 물고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물고기가 얼마나 아프면 소리까지 내어 울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로는 누가 낚시를 가자고 권해도 간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갈 마음이 없다.
역사와 더불어 인간의 감수성은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다. 고대인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들을 노예로 삼아 강제노역을 시키고 쓸모가 없어지면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되는 재산 목록으로 알았다. 시대가 흐르면서 사람들은 노예들의 고통과 슬픔을 인지하고 노예도 같은 인간임을 깨달으면서 노예제도를 폐기하였다. 그래도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른 종족은 여전히 열등한 종으로 간주하고 노예 취급을 계속했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세계인들은 어떤 종류의 인종차별도 인간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비인간적인 소행임을 공감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다른 종족에 대한 차별만이 아니라, 같은 종족 안에서도 여성·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사회계층 간의 다양한 차별이 모두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적폐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만큼 인류의 의식이 진화하고 성숙했다는 표지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 의식은 아직 대단히 닫혀 있다.
최근 정부가 마련한 민법 개정안에서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고 규정되었다고 한다. 기존의 동물보호법에서는 ‘개’, ‘고양이’, ‘토끼’, ‘기니피그’, ‘햄스터’, ‘패럿’ 여섯 종류에 한해서만 고통을 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법 개정안은 동물의 종류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동물이 생명체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격상된 것이다. 우리에게 인간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과 의식을 감지하는 인지능력과 다른 존재와의 소통 능력이 개발된 것이니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인지력과 소통 능력은 겨우 첫걸음을 뗀 정도다. 우리는 그동안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한 자의식으로 자연생태계 전체를 인간이 개발해주기를 기다리는 물건들의 창고로 간주하며, 마음대로 파헤치고 꺼내 쓰고 폐기해도 되는 줄로 인식하고 다루어왔다. 그 결과 모든 생명체의 보금자리인 지구가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는 기후위기를 맞게 되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바다가 오염되고, 생명의 원천인 물과 산소를 공급해주는 원시림이 불타오르고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많은 인간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고 많은 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언덕길에서 무거운 수레를 끌고 올라가는 소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코에 구멍을 내고 고삐를 끼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아플까 하고 마음이 아렸다. 시골에서 소를 키워본 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소도 들판에서 풀을 실컷 뜯어 먹고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서 물을 가득 마시면 배가 빵빵해지고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흥얼흥얼 노래를 한단다. 여러 해 키운 소는 가족 같아서 장에 팔려갈 때 소도 주인도 눈물을 흘리고, 도살장에 끌려갈 때도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소, 양, 염소, 돼지 같은 가축은 고대사회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고대인들이 가축을 도축하는 첫째 목적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고기를 먹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 참여한 이들이 신의 축복에 동참하기 위함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주식은 본디 곡식에서 만든 ‘밥’이나 ‘빵’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유일한 기도문 중간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며 청원하는 표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식’이라고 번역하여 기도하고 있지만, 원문은 ‘빵’이다. 소나 말 같은 가축은 곡식농사를 짓기 위한 노동의 조력자이지 인간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류는 고기맛을 알기 시작하면서 차츰 가축을 노동의 조력자가 아닌 먹잇감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간은 가축들을 옴짝달싹 못하는 좁은 우리에 가두어 집단으로 사육하고, 유전자까지 변형하여 입에 맞는 살코기를 최단시간에 최대한 생산한다. 2020년 한 해 동안 수입육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만 도축된 소가 88만7천두, 돼지가 1832만두, 닭이 10억7천만마리, 오리가 6600만마리에 달한다. 1980년대 초에 비해 지금 우리 국민 1인당 육류 소비량이 5배 이상 증가했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맑은 시냇물이 흘러 즐겨 물놀이하고 송사리와 가재를 찾으며 놀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가축들이 쏟아내는 오물로 산과 강이 다 오염되어 발 담글 생각도 안 든다. 가축들의 탄소배출이 온실가스의 절반을 차지한다. 우리의 욕심이 지구 생태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인류는 같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는 소통과 공감 능력을 꾸준히 계발해왔다. 피부색과 종족과 성적 다양성과 모든 사회적 계층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존중과 연대를 확대해왔다. 이에 비하여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우리의 인지감수성은 아직 너무나 미성숙 단계에 있다. 모든 생명체가 영양분을 공급받고 수명이 다하면 되돌아가야 하는 대지는 50억년의 세월을 두고 뜸을 들여 창조된 최고의 걸작이다. 우주 태초의 대폭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37억년이란 까마득한 세월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득한 영겁의 세월이 걸려서 아주 서서히 빚어지고 숙성된 땅덩어리는 온갖 생명체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무생물들, 생명체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준 무기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거대한 생명체의 생애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마치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에 출현하고 셋방살이하는 티끌 같은 존재다. 이 티끌 같은 존재가 오만방자한 폭력을 행사하여 우리를 낳고 키워준 어머니 같은 지구의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게 하였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 생명체들만이 아니라 비생명체들에 대해서도 각 존재의 고유한 역할과 가치를 인지하고 존중할 줄 아는 생태인지 감수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주와 함께 사는 길이다.
한겨레 신문 원문 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09359.html?_fr=m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