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강우일 주교님 서울 전쟁기념관 앞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존재를 위한 추모 미사 강론

센터알리미 0 27 04.25 19:23

전쟁이 사라지는 날까지!

2026.4.25.

 

제주 강정에서는 2011년부터 매일 오전 11시에 해군기지 옆 길가 천막에서 생명평화 미사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2016년에 해군기지 공사가 끝났으나 미사는 15년 동안 계속 이어져 왔고 오늘이 6918일째 되는 날이다. 그곳에서 매일 미사 주송을 보는 강정 공소 선교사는 미사 시작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입당송을 외친다. “이 땅에서 전쟁이 없어지고 군대가 사라지며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생명 평화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전쟁기념관 앞에서 전쟁으로 희생된 헤아릴 수 없는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고, 이 순간에도 중동 지역에서 벌이고 있는 전쟁이 하루빨리 막을 내리고, 인류가 이 세상에서 전쟁이라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포기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거행한다.

 

나는 1945년 생이다. 다섯 살 때 6.25가 터졌다. 625일 당일 기억은 대낮에 전쟁이 터져 서울역 앞에서 휴가 나왔던 젊은 병사들이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트럭에 타던 장면이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네하고 느꼈다. 다음 날엔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기온이 낮았던 것 같은데 기온보다도 멀리 북쪽에서 포 소리가 쿵쿵 들려오는데 두려움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운이 좋아 극적으로 서울을 탈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전쟁통의 학교생활에서 제일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학교 가는 골목길에 있던 군부대 야전병원 천막이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전방에서 후송된 부상병들이 지르는 끔찍한 비명과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무서워 뛰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전쟁이 끝나도 초등학교 시절 내내 누가 문을 두드려서 대문에 나가보면 한쪽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들이 먹을 게 없다며 도움을 청하였다.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화가 나 있었다. 전쟁에 나가 싸우다가 이런 꼴을 당한 데 대한 억울함과 분노에 가득 찬 것 같았다. ‘사지가 멀쩡한 너희가 우리를 먹여 살려야 할 게 아니냐?’하고 따지고 항의하는 듯한 태도였다. 어린 마음이지만 이들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무섭고 한편으로는 너무 가슴이 아팠다.

 

6.25전쟁은 불과 3년 정도 이어졌지만, 양측 군인들만 200만 넘게 죽었다. 그런데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훨씬 더 많이, 3백만이나 죽었다. 직접 무기 들고 싸우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6.25 전쟁의 경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이 전선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놀라운 속도로 남하하여 경상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3개월 후 9월에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북한군의 허리가 잘리자, 김일성은 927일 인민군에게 전략적 후퇴를 명령했다. 이때 퇴각을 시작한 인민군은 점령 지역 내의 형무소, 내무서 유치장 등에 감금돼 있던 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926-30일 사이에 대규모 학살이 집중되었다.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84.6%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유엔군이 진격하며 남한 지역이 다시 국군 수중에 들어온 후, 이번에는 국군과 경찰이 인민군에 부역한 이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남측이 저지른 학살은 195010월부터 중공군이 참전하는 19511월까지 넉 달 동안 계속되었다. 19509월 말부터 1230일까지 55만여 명이 인민군에 협력한 혐의로 검거되었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들 중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고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자 다시 공산당 세상이 된 북부 지역과 중부 지역에는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6.25가 터지자마자 남한에선 공산당에 협력할 위험이 있다며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던 20만 명의 민간인들이 곳곳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대표적인 장소가 대구 달성군 가창골이다. 19506~9월 대구형무소에 수감 되어있던 재소자 3천 명과 각지에서 예비 검속된 보도연맹관련자 5천여 명 등 8천여 명이 가창골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작년 가을에 나는 그 가창골에 가보았다.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어 경관이 좋고 계곡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다. 1959년 정부는 계곡을 막아 댐을 건설했는데 지금은 대구 시민의 식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가창 댐 아래쪽에 대구 10월항쟁 기념비가 서 있었다. 그곳 관계자가 이야기를 들으니 가창댐을 건설할 당시 굴착기로 땅을 파자 유골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하룻밤에 80 가마니 분을 채워도 계속해서 나오니 굴착기 기사는 도저히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하면서 가버렸다고 했다.

 

6.25때 부역자로 처형된 사람들 가운데는 여성들이 많았다. 전쟁이 터진 후 남자들은 많이 피난을 갔고 인민군이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은 집에 남은 여성들이 많았다. 또 여성들은 양측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뿐 아니라 한국군 고위 장성 가운데 일본군 출신이 여럿 있었고 이들은 과거 일본군 시절 배운 위안부 제도를 1951년부터 54년까지 3년 동안 공식적으로 운용했다. 이 여성들은 미군이나 국군에게 생포된 인민군 간호원, 좌익 여성, 북한 지역 여성들, 그리고 국군에서 동원한 이들이었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적을 죽여야 끝나는 살상 행위다. 2차 세계대전 중 S.L.A. 마셜이라는 미 육군 준장은 국방성의 지시를 받아 미군 병사들의 전투심리에 관한 조사를 벌였다. 태평양 전선과 유럽 전선에서 전투 중이던 400개가 넘는 보병 중대 병사들 수천 명을 개별 면담했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마셜 준장은 총 쏘길 거부하는 사람들’(Men Against Fire, 1946년 판)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 한 방이라도 제대로 적을 향해 총을 쏜 미군 병사는 1520%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8085%는 일부러 총알을 다른 곳으로 쏘거나 아예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마셜 준장이 내린 결론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킬러가 아니다(Human beings are not, by nature, killers)”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목숨을 빼앗는 데 본능적으로 저항감을 느낀다. 하지만 군대가 개발한 여러 훈련과 세뇌를 통해 그런 혐오감을 덮고 폭력에 익숙해진다. 1980년에 다이엔 아처와 로즈메리 가트너라는 미국의 사회학자는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10(196373) 동안 미국 내에서 살인사건이 급속히 늘어난 원인이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기간 미국은 남성에 의한 살인이 101%, 여성에 의한 살인이 59% 증가했다. 전쟁에 나간 이들은 처음에는 타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다가 옆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접하며 큰 충격을 받고 적군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자신도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익숙해지고 폭력에 무디어진다. 폭력에 익숙해진 이들은 폭력의 사슬에 묶여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하고 전승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폭력에 익숙해진 병사들도 사실 자기 내부에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베트남전 참전 미군 병사들 가운데 30%가 외상후스트레스증후(PTSD)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베트남 전 참전 미군의 전사자보다 더 많은 이들이 제대 후 PTSD로 자살에 이르렀다고 한다. 최근 미국 브라운대학 연구진에 의하면 2001-2021년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병 중 최소 3177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이는 같은 기간에 발생한 미군 전사자 7057명 보다 4배 이상 많은 죽음이다. 또 자살까지는 안 해도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로 정신질환이나 약물중독에 빠져 정상적인 가정생활, 사회생활이 무너진 재향군인들이 더 많았다. 참전군인들은 귀환 후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아내와 가족에게 폭행을 가한 이들이 많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전쟁 하면 한국군이 저지른 1만여 명 가까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만 한국군 병사들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 장병들을 조사한 결과 전투 지역에 직접 노출되었던 재향군인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 확률이 7배나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Journal of Digital Convergence Vol. 17. No. 11, pp. 547-556, 2019) 김윤영1, 현혜순2, 최나영1, 김태열3*

1국립안동대 간호학과 조교수, 2상명대 간호학과 부교수, 3영남이공대 보건의료행정학과 부교수

이렇게 전쟁이란 세상에 가장 고귀한 인간 생명을 수없이 살해하고 상처 입힐 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 살아남은 가해자, 피해자 모두 인간 본성을 상실하고 인격이 파괴되고 평생 엄청난 외상후스트레스 후유증에 시달리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전쟁은 인간 생명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더라!’라고 하시고 수십억 년 동안 가꾸어 주시고 키워내신 아름답고 조화로운 다른 피조물들에도 파괴와 멸종의 재앙을 몰고 온다. 전쟁은 불의와 죄악의 열매이고 거기서 어떤 선하고 좋은 열매도 나오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이들은 인간 생명을 말살하는 무기를 팔아 돈을 버는 방위산업체와 무기상뿐이다. 한마디로 전쟁은 지구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비극이고 인간이 초래하는 최악의 재앙이다.

 

오늘 우리는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6.25 전쟁, 베트남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 앞에서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를 지내고 있다. 기념이란 말은 우리말 사전에서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니 ‘6.25를 기념한다, 임진왜란을 기념한다, 세월호 사고를 기념한다.’라는 표현은 아주 잘못된 우리말이다. 전쟁기념관이란 타이틀은 현대사에서 우리 국가와 인간들이 저지른 가장 뼈아프고 참혹한 재앙을 마치 훌륭한 업적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옛날 전쟁에 승리한 제왕들이나 독재자들이 자신의 위업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개선문을 크게 세우는 것과 같은 미개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전쟁은 기념해야 할 선업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되는 사회적 불의와 윤리적 죄악이다. 그러니 우리가 전쟁에 대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인간들이 저지른 불의와 죄악을 정확히 인지하고 사죄하고 참회하며 다시는 그런 비극을 재현하지 않으려는 각오와 연대와 제도를 만들어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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